백정기는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계장치를 미술작품으로 만드는 작가다.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능성 예술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보면 훌륭한 의도와 역할을 가진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사실 백정기의 작품들은 사회의 일반적 통념으로 평가했을 때, 그렇게 올바르지 않다. 오히려 삐딱한 의도로 문제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반 기능성 예술작품'이라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가령 그는 공부만 하지 말고 TV도 보라고 친절히 독려하고 배려하는 TV 스탠드와 기능성 독서대 < 공부만 하세요? >를 만들었다. 또 우유나 신문을 배달하는 사람들이 배달 오토바이 위에서 보다 풍요로운 멀티미디어 문화생활을 구가할 수 있도록 카메라와 오디오를 장착한 < RMP (Ridable Multimedia Player) >를 만들었다. 목적 합리적이고 효율성 중심으로 작동하는 우리의 일반적 교육방식으로 봤을 때, 공부하면서 TV도 보고 놀라고 권장하는 기계장치는 비합리적이다. 안전성을 취우선으로 두는 우리의 생활감각으로 보면, 백정기< RMP >는 배달원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장치일 수 있다.
그렇다면 백정기가 이렇게 비합리에 위험천만한 기계장치를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새로운 형식의 예술작품을 실험하느라고? 기발한 아이디어로 보편적 통념을 도발하기 위해? 백정기는 상당히 똑똑한 작가다. 그는 단순히 심미적 목적에서 어떤 비합리적 기능을 수행하는 기계장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비판적 의미를 개진하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매체 환경에 대한 '대안적 모델'을 제시하기 위해 그런 것들을 만든다. 교환가치만을 위한 공부지상주의 대한민국 비판, 관료주의적 사고 비판이 전자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미 미디어를 통한 간접 체험이 일상이 된 우리의 문화 환경에서 풍경, 속도, 진동, 소음, 흔적을 실시간의 신체 감각으로 회복시키는 대안적 매체가 후자이다.